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어릴 적에는 하느님이 정말 계시냐 아니냐를 두고 많은 다툼이 있었고, 중학생이 되어서는 부처가 세냐 예수가 센가 하며 논쟁을 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생각이 자라면서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은 증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다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문제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살아 있고 세상이 이렇게 존재한다면 하느님은 아니 계실 수 없다는 믿음이 점진적으로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제는 하느님이 존재하는가? 여부가 아니고 하느님이 어떤 분인가? 곧, 어떻게 하느님을 섬겨야 하느냐의 문제가 중요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라고 말을 건네자 그 여인은 곧바로 물을 떠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처지는 예수님과 상종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주저했습니다. 북부 이스라엘과 남부 유다가 솔로몬 이후 갈라져 서로 상종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여인이 어떻게 당신은 유다인이면서 나에게 그런 청을 하는가? 오히려 반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내가 누구인 줄 알았다면 오히려 나에게 마실 물을 청했을 것이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자 이 여인은 “선생님은 두레박도 가지고 계시지 않은데 어떻게 주실 수 있는가? 라고 반문합니다. 예수님은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여인은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목마르지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이리 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이렇게 이어지는 예수님과 여인과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이 여인은 기쁨과 희망으로 가득하게 되어 갑니다. 이렇게 여인이 기쁨과 희망으로 바뀌게 되는 원인을 곰곰이 살펴보면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말하는 일종의 대화 방식이 맺혔던 상처를 치유하며 동시에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저 듣기만 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자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애정이 필요하고, 상대방의 필요를 감지할 수 있는 감수성과 집중력이 또한 필요하다 점을 가르쳐 줍니다. 듣는 사람 또한 상대의 말에 이 신뢰를 둠으로써 치유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믿음은 점진적인 과정입니다. 예수님을 알아 가는 데 어느 순간 그 모든 것을 알게 됨이 아니라 이런 저런 질문과 참여를 통해 확고한 믿음에 다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전혀 알지 못했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통하여 예수님을 이해해 갑니다. 자신의 삶을 통하여 예수님을 이해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셈입니다.

또한 믿음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머무르지 않고 다른 이들을 예수님께 이끄는 역할을 합니다. 다른 이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고 그들이 그분을 믿을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자신의 믿음을 다른 이에게 증언하는 것이야 말로 선교의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요?

-주임사제 고봉호 베드로-

2020년 3월 15일 제 2242 호 주보, 말씀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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